포도, 익숙함을 확대하다

Sep 29, 2026

포도, 익숙함을 확대하다

고려명은 포도를 찍는다. 우리가 식탁에서 마주하던 크기와 거리는 아니다. 대형 아날로그 카메라로 포도 한 송이를 코앞까지 끌어당기고, 주변은 모두 비운 채 화면 중앙에 세운다. 확대된 포도는 과일보다 색과 형태가 뭉친 풍경에 가깝다. 희끗한 분가루, 가느다란 주름, 빛을 머금은 윤기. 평소엔 눈길 닿지 않던 디테일이 선명해진다.

빛과 색이 만든 포도의 표정

대표작 <PODO> 연작은 구성이 단순할수록 힘을 낸다. 넓은 여백 속 포도송이는 작지만 또렷하고, 겹쳐진 알들은 조각처럼 입체적인 덩어리를 이룬다. 그 틈으로 스민 그림자와 미세한 색 차이를 따라가면 시선은 자연스레 화면 중앙으로 모인다. 멀리서는 형태가, 가까이서는 포도알 하나하나의 결이 눈에 든다.

작품마다 포도의 얼굴은 다르다. 빨강과 노랑, 파랑과 초록이 겹친 쪽은 밝고 경쾌하며, 검은 배경 위 짙은 보라와 금빛 포도알은 한 송이를 어둠 속에서 도드라지게 한다. 핑크 포도와 흰 배경은 꽃이라 해도 믿을 만큼 부드럽다. 색의 농도와 배경만 바뀌어도 같은 형상이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낸다.

포도는 오래전부터 생명과 풍요의 상징이었다. 고려명의 포도도 탐스럽게 영글어 있다. 그러나 가까이 보면 팽팽한 표면 곁에 살짝 마른 주름과 작은 흔적이 남아 있다. 완벽하게 반짝이는 정물이 아니라, 한 송이가 익고 변해가는 시간까지 찍혀 있다.

한 송이가 공간에 놓일 때

마음에 드는 도상을 원하는 크기로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이번 <PODO>의 매력이다. 작은 사이즈에서는 한 송이의 색이 분명한 포인트가 되고, 커질수록 포도알의 질감과 덩어리감이 공간을 채운다. 작품이 놓일 자리와 바라보는 거리에 따라 같은 이미지도 다른 인상을 남길 터.

아트앤에디션이 선보이는 고려명의 <PODO>는 화려한데 소란스럽지 않다. 강한 색과 선명한 형태가 공간의 중심을 잡고, 넉넉한 여백이 시선을 한 송이에 붙든다. 식탁 위에서 무심히 지나쳤던 포도 한 송이는, 이제 오래 바라보고 싶은 이미지로 자리를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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