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머금은 유리
Nov 3, 2025
유충목의 작업은 유리라는 물질을 통해 시간의 감각을 가시화하는 데서 출발한다. 실제 물방울과 가장 흡사한 소재인 유리는 그의 손을 거치며 단순한 재료를 넘어, 변화와 지속, 기억과 현재가 교차하는 조형적 언어로 확장된다. 투명하고 단단하면서도 동시에 연약한 유리의 속성은, 작가가 오랜 시간 탐구해온 정체성과 감정의 양가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독일, 미국, 영국 등지에서의 장기간 체류와 국제적 활동은 유충목의 작업 세계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급변하는 사회와 문화적 환경 속에서 그는 한국 미술의 시각적 언어를 다시 바라보며, 자신의 정체성과 감각을 조형적으로 재구성해왔다. 이러한 과정은 과거와 현재, 개인과 집단의 기억이 겹쳐지는 화면 구조로 이어진다.
작품 속에서 거친 질감의 황목 캔버스는 과거의 시간과 기억을 상징하며, 그 위에 놓인 색과 유리 물방울은 현재와 미래의 감정 상태를 담아낸다. 특히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유리 물방울의 그림자는, 고정된 형상 안에서 끊임없이 달라지는 시간의 흐름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이는 물방울이라는 모티프를 단순한 재현이 아닌, 시간성을 내포한 조형적 사건으로 전환시키는 지점이다.
유충목은 한국을 대표하는 단청과 오방색의 조형 원리를 바탕으로, 선과 면, 입체의 관계를 화면 안에서 추상적으로 풀어낸다. 수직과 수평이라는 기본적인 구조는 그의 작업에서 화면을 지탱하는 질서로 작동하며, 회화와 조형,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든다. 이러한 작업은 유리가 지닌 물성과 한국적 조형 언어, 그리고 동시대적 감각이 결합된 독자적인 조형 세계를 형성한다.
아트앤에디션과 함께 전개되는 유충목의 작업은, 국제적 경험을 바탕으로 축적된 조형 언어를 일상의 공간으로 확장하는 실천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물질과 빛, 시간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탐구하며, 동시대 미술 안에서 유리라는 매체가 지닐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