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남동을 그리는 마음, 정보연
Oct 27, 2026
높이도 방향도 다른 집들이 언덕을 따라 모여 있다. 지붕 사이로 좁은 골목이 나고, 꼭대기에는 교회가 보인다. 정보연이 그리는 한남동이다. 누군가는 그림 앞에서 자신이 살던 동네 이야기를 꺼내고, 아이들은 사람들이 이런 곳에 살았느냐고 묻는다. 같은 그림을 두고 서로 다른 대화가 시작된다. 작가는 스케치북과 도시락을 챙겨 한남대교에 올라 몇 시간씩 그 동네를 바라보았다. 불화를 그리던 아버지에게 배운 채색, 큰 벽에 명화를 모사하던 경험, 영화에 필요한 그림을 그리며 익힌 기술로 복잡한 풍경을 조금씩 옮겼다. 배접한 천 위에 직접 간 안료를 올리고, 가느다란 붓으로 집 한 채와 창문 하나를 채우는 작업. 재개발로 자신이 보아온 모습이 사라진 뒤에는 모아둔 스케치가 더욱 소중해졌다. 정보연에게 한남동을 그리는 마음을 물었다.
Q. 작가님과 작업을 소개해 주세요. A. 한국화를 전공했고, 전통 채색 기법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정보연입니다. 분채와 석채, 안료를 써서 작업합니다. 시작하기 전부터 손이 많이 가는 편이에요. 지금까지 여러 소재를 그려왔지만 대표작을 꼽는다면 한남동 풍경입니다. 예전에 오주석 선생님께 수업을 들었는데, 작가는 일평생 작품 하나로 기억돼도 된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 말을 늘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여러 소재를 거쳐 제가 찾은 것이 한남동 그림이 아닐까 싶어요.





Q. 불화를 그리셨던 아버지에게 어떤 영향을 받으셨나요? A. 아버지께서 집에서 탱화의 밑그림인 초를 뜨실 때, 제가 옆에서 먹을 갈아드리곤 했어요. 아버지의 가느다란 붓끝에서 그림이 그려지는 걸 보고, 먹 향을 맡으면 마음이 설렜습니다. 한국화를 전공하게 된 것도 그 장면에 많이 이끌렸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일곱 살 때부터 화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뒤를 그대로 잇기보다는 제가 그리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그리는 화가가 되고 싶었어요. 이후 서른 살 무렵부터 아버지를 따라 단청 작업을 다니고 탱화를 배우면서, 지금 사용하는 채색 방식이 자연스럽게 몸에 익었습니다.
Q. 한남동 풍경을 처음 그리게 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2004년 무렵 육교 위에 올라갔다가 그 풍경을 보고 놀라서, 그 자리에서 스케치를 하고 내려왔어요. 처음에는 그저 엄청난 풍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걸 어떻게 그림으로 옮길 수 있을까 막막하기도 했고요.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건 2009년입니다. 그때 제게 시련이 좀 있었어요. 어릴 때부터 화가가 되겠다고 살아왔는데, 현실을 마주하니 모든 게 막막했습니다. 계속 그림을 그려야 하나, 그릴 수는 있을까 고민하던 시기였죠. 그러다 밤에 버스를 타고 지나가는데, 노란 가로등과 교회 불빛이 어우러진 야경이 너무 아름답게 보였어요. 그 풍경을 보고 다시 한남동을 그리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다음부터 스케치북을 들고 한남대교에 올라갔고, 도시락까지 싸 가서 몇 시간씩 그렸어요. 저 사람들이 저렇게 살아가듯 나도 열심히 살고 그림을 그리자고 다짐했습니다.





Q. 그림 속 색과 빛은 실제 풍경에 얼마나 가까운가요? A. 제가 눈으로 본 것을 마음에 담아 그렸습니다. 한남동 야경이 실제로 그렇게 보여요. 그런데 그 풍경을 보면 다들 그림 같다고 하고, 제 그림을 보면 사진 같다고 하세요. 현실에서는 판타지를 느끼고, 그림에서는 실제 눈앞에 있는 듯한 생생함을 느끼는 것 같아요. 그 두 가지가 함께 있는 거죠. 현실이지만 그 안에 판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Q. 한남동을 직접 손으로 그려 남기고 싶었던 마음이 궁금합니다. A. 처음 그 풍경과 맞닥뜨렸을 때의 느낌을 저만의 색채와 방식으로 담고 싶었어요. 같은 장소를 찍은 사진이나 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저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를 좋아해요. 아무것도 없는 하얀 종이를 보면 늘 두근거리고, 그 안에 그릴 수 있는 것들이 무궁무진하게 떠오릅니다. 제가 보고 느꼈던 한남동을 제 손으로 남기고 싶은 거예요.





Q. 채색은 어떤 순서로 진행되나요? A. 먼저 천을 배접하고 말려서 틀에 붙입니다. 그 위에 바탕칠을 하고 밑그림을 옮긴 뒤, 아주 가느다란 세필로 공들여 채색해요. 물감도 색마다 직접 갈아서 준비합니다. 그림에 들어가는 색을 만드는 것부터 제 손을 거치는 셈이죠. 천을 쓰는 것도 아버지가 불화를 그리시던 방식에서 왔어요. 불화는 대체로 크기가 커서 바탕이 견고해야 하거든요. 아버지 곁에서 배우고 도와드리다 보니 익숙해졌고, 지금까지 그 방법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작업이 고되게 느껴질 때도 있어요. 그럴 때면 아버지 말씀이 생각납니다. 탱화는 그리는 일 자체가 수행이니 점 하나도 허투루 그리지 말고 꼼꼼하게 채우라고 하셨어요. 저도 그 마음으로 하나하나 그리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Q. 금분과 금박은 화면에서 어떤 역할을 하나요? A. 불화에 쓰는 재료를 제 그림에도 적용하게 됐어요. 특히 야경의 반짝이는 불빛을 표현할 때 필요합니다. 금분과 금박이 들어가면 그림에 생기가 더해지는 것 같아요.
Q. 도시 풍경과 함께 국화를 그리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무엇을 그려도 제 그림인 줄 알아볼 수 있는 색과 스타일을 갖고 싶었어요.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처럼요. 꽃도 늘 그리고 싶었는데, 어느 해 가을 꽃가게마다 동그랗게 다듬은 국화 화분을 내놓은 걸 보았습니다. 제가 그리고 싶은 꽃을 찾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한남동 야경에서 가로등을 노랗게 칠하는데, 그 노란색을 참 좋아합니다. 같은 색으로 노란 국화를 그리게 됐어요. 한국화를 전공해서 국화가 친숙하기도 했고요.
Q. 영화 작화에도 참여하셨는데, 어떤 작업이었나요? A. <왕의 남자>를 시작으로 <음란서생>, <방자전>, <군도>, <리멤버>, <고산자>, <도굴> 등 여러 영화에 참여했고, <승부>에도 제 그림이 나왔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그림을 계속하려면 생계를 위한 일도 해야 했어요. 이왕이면 그림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자고 생각했죠. 20대에는 음식점과 카페 등을 다니며 큰 벽에 동서양의 명화를 모사하는 작업을 많이 했습니다. 이후에는 아버지께 탱화를 배웠고요. 영화 미술감독으로 일하는 남편을 통해 미술팀과 함께 작업하게 됐습니다. 영화 현장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요구도 많고 여러 형식의 그림을 그리게 돼요. 그런 일을 거치면서 그림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어떤 크기나 바탕, 재료를 만나도 그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한남동의 거대한 풍경도 처음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집들을 동그라미, 세모, 네모로 보자고 생각했어요. 그동안의 경험이 바탕이 되니 복잡한 풍경도 어떻게든 옮길 수 있었습니다.





Q. 이번 전시작에서 눈여겨보면 좋을 부분을 짚어주세요. A. 이번에는 해 질 무렵의 풍경을 그린 작품들을 선보입니다. 저는 그 시간의 차분함을 좋아해요. 따뜻한 햇살이 서서히 어두워지는 과정이요. 그림을 보시면 빛의 방향에 따라 명암이 나뉘고, 맨 위에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 아래 집들에서는 사람들이 각자의 사연을 안고 하루를 살아가고 있겠죠. 저는 그 풍경에서 평온함을 느꼈어요. 어렸을 때 살던 동네 같기도 하고, 어디선가 엄마가 저녁밥 먹으라고 부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보시는 분들도 평범한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느끼셨으면 해요.
Q. 작품을 보고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분들도 있나요? A. "여기 내가 살던 동네인데, 나 여기 살았었는데" 하면서 옛날이야기를 많이 해주세요. 특히 연세가 있는 분들이 좋아하셨어요. 저도 어릴 때 그런 동네에서 자랐기 때문에 서로 이야기가 잘 통했던 것 같습니다. 반대로 아이들은 "이런 풍경이 있어? 사람들이 이런 데 살아?" 하고 묻더라고요. 그 반응이 참 놀라웠습니다. 누구에게는 익숙한 동네인데, 아이들에게는 처음 보는 모습이었던 거죠.




Q. 작품을 보는 분들께 전하고 싶은 마음은 무엇인가요? A. 그리움입니다. 제가 바라보았던 한남동 풍경이 이제는 사라졌어요. 그래서 더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잊히는 것들이 있지만, 그중에도 꼭 간직했으면 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저는 그걸 한남동에서 봤습니다. 나중에 이 그림을 보면서 우리가 이곳에서 이렇게 살았다는 걸 기억하고 추억하셨으면 좋겠어요.
Q. 앞으로 어떤 작업을 이어가실 생각이세요? A. 그동안 스케치는 많이 했는데 그림으로는 다 옮기지 못했어요. 작업이 오래 걸리기도 하고, 일상에 쫓기기도 했죠. 그런데 그 풍경이 사라지고 나니 더 소중해졌습니다. 아직 그리지 못한 것들을 남기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작업하고 있어요.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을 그린 인물 스케치도 많이 모아두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그 작업도 함께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Interview by ARTN Edi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