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큐와 물방울 앞에서
Oct 31, 2025
투명한 조형 : 김창열의 물방울에 투영된 감정
MMCA 서울관에서 본 김창열의 작업은 물방울이라는 형식에 깃든 오랜 사유를 다시 환기한다. 그가 구축해 온 회화의 세계가 조용한 호흡으로 다가온다.
김창열(1929-2021)의 물방울은 처음 보면 차갑도록 맑다. 그러나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그 표면 아래에서 아주 느린 온도가 올라온다. 그 온도는 오늘의 우리로서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평안남도 맹산 출신인 작가는 열여섯 살 무렵 홀로 월남했고, 전쟁의 기척이 일상의 숨결처럼 스며 있던 시대를 건너왔다. 젊은 시절 그가 >제사<라는 제목을 반복해 붙였던 이유처럼, 살아남은 자가 품게 되는 마음의 무게와 누군가는 자꾸 잊으라 하지만 쉽게 잊히지 않는 감정. 물방울은 그런 마음의 무게를 품고 있다. 맑지만 가볍지 않고, 투명하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물방울 앞에 서면 ‘남겨진 자의 눈물’을 떠올리게 된다. 웃음이든 울음이든, 한 번 올라오면 도로 집어넣기 어려운 감정의 조각일지 모른다
그가 평생 이 한 가지 모티프를 밀고 나간 이유는 형태와 감정 사이에서 생기는 이 미묘한 간극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 *앵포르멜 시기의 두터운 표면, 뉴욕과 파리에서의 기하학적 긴장, 그리고 어느 순간 투명한 구체로 귀결되는 흐름은 마치 한 사람이 길게 토로하고 난 뒤 남긴 단 한 줄의 요약문처럼 느껴진다. 불필요한 것을 걷어내고 남은 핵심과 그 단순함이 오히려 감정의 가장자리까지 데려다주는 방식으로 그의 물방울은 그 모든 과정을 조용한 반지름 안에 품고 있다.
김창열의 물방울은 실재하는 물의 모사가 아니다. 실제로 화면을 보면 물방울은 바탕 위에 얹혀 있는 듯하면서도 어느 순간 바탕을 밀어 올리는 부력처럼 보인다. 생지, 모래, 낡은 종이, 천자문 등 위에서 물방울은 늘 중간 지점을 점유한다.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날아가려는 것도 아니고, 그 둘 사이의 얇은 틈에 자리한다. 그 틈은 그의 회화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처럼 보인다. 소리 내지 않고 울 수 있는 바로 그런 작은 공간 말이다.
그에게 물방울은 사라짐의 표식이면서 동시에 사라지지 않으려는 의지였다. 현실에서 물방울은 잠시 머물다 금세 사라져 버리지만, 그의 화면에서는 그 순간이 영원하듯 고정된다. 사라질 것임을 알고 있는 존재가 멈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시간의 역행에 가깝다. 그래서 그의 물방울을 보고 있으면 ‘지나간 감정이 아직 떠나지 않았다’는 묵묵한 진실이 느껴진다.
1980년대 이후의 <회귀> 연작은 물방울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유년기에 조부에게 배운 천자문은 작가의 ‘기억의 기원’이었고, 그 문자 위에 투명한 물방울이 놓이면서 화면은 새로운 층을 갖는다. 문자라는 질서와 물방울이라는 소멸의 형식이 하나의 호흡 안에서 공존하게 된다. 이 조합은 설명하기보다는 ‘느끼게 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데, 특히 대형 <회귀> 작품 앞에서는 오래된 기도문 같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 기도문은 누군가를 위한 애도이기도 하고, 자신을 향한 침묵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김창열의 작품을 개인의 공간에 들여놓는다는 것은 단순한 소유 이상의 일이다. 물방울 하나가 벽에 걸리면 방 안의 속도가 아주 조금 느려지고, 빛이 더 오래 머무르며, 시선이 분산되는 일이 줄어든다. 물방울 작품을 두고 ‘자꾸 눈이 간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은 이유도 강한 시각적 효과 때문이 아니라, 공간 전체의 호흡을 정리하는 방식 때문일 것이다.
지금 김창열의 물방울을 다시 바라본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한 행동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오래 곁에 있던 이미지를 이제야 적절한 거리에서 다시 보는 일에 가깝다. 그의 물방울은 단순한 소재를 넘어 어떤 감정이 통과한 뒤에도 남은 표면이며, 우리는 그 앞에서 결국 비슷한 감정에 닿는다. 말로 하면 가벼워질 것 같아 차마 말하지 못했던 감정들, 그리고 그 사이에 조용히 맺힌 투명한 공간들. 그 공간이야말로 김창열이 평생 화폭을 통해 조용히 붙잡아 두려 했던 세계일지 모른다.
*앵포르멜 : 1940~50년대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된 추상미술 운동.
글 이혜민 큐레이터18년간 미술관과 전시 현장에서 활동해 왔다. 한국일보 문화사업단, 일민미술관, 서울경제 백상미술정책연구소를 거치며 작품 앞의 순간을 기록했다.
- Info
- <김창열>
- 2025년 8월 22일 ~ 12월 21일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www.mmc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