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빛과 공간을 잇는 회화, 김세중
Sep 10, 2026
김세중의 작업은 빛에서 시작하지만 빛의 이미지를 그리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작가는 캔버스의 틀을 직접 만들고 천을 밀고 당겨 화면 안에 공간을 구축합니다. 그 위에 물감을 쌓고 실제 빛이 들어올 자리를 만들면, 굴곡을 따라 그림자가 생기고 평면이었던 회화는 입체적인 공간으로 확장됩니다. 프랑스 앙티브 해안에서 마주한 새벽의 윤슬, 안도 다다오의 ‘빛의 교회’, 오래된 재료에 남은 시간, 파리에서 가져온 블루 피그먼트까지. 서로 다른 경험은 김세중의 화면 안에서 빛과 색, 구조와 물성으로 이어집니다. “남보다 표현을 잘하지 못하더라도 남과 다른 방법을 찾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것은 익숙한 표현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들며 빛과 공간을 이어온 김세중 작가를 만났습니다.


Q. 작가님의 작업을 직접 소개해 주세요. A. 저는 새로움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회화와 조각을 합치는 작업을 하는 김세중입니다. 물감으로 이미지를 그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틀과 캔버스의 구조를 바꾸어 화면 안에 실제 공간을 만듭니다. 제 작업에는 회화적인 색과 붓질이 있는 동시에 조각적인 구조와 부피가 있습니다. 회화 작가나 조각가 가운데 하나로 구분하기보다 현대미술 작가라고 소개하는 것이 제 작업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Q. 빛을 작업의 중심에 두게 된 시작은 어디였나요? A. 프랑스 남부를 여행하던 중 미리 숙소를 예약하지 못해 밤새 호텔을 찾아 헤맨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앙티브 해안에서 아침을 맞았는데, 해가 떠오르면서 바다 위에 윤슬이 펼쳐졌어요. 그 빛이 정말 아름다웠고, 당시의 제게는 희망처럼 다가왔습니다. 빛은 저에게 아름다움을 전해주는 동시에 관람자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건넬 수 있는 존재라고 느꼈습니다. 그다음에는 이 빛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당시에도 빛과 풍경을 그리는 화가들은 많았지만, 다른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지는 않았어요. 남보다 표현을 잘하지 못하더라도, 남과 구별되는 저만의 방식을 찾는 일이 더 중요했습니다. 캔버스 천을 변형하고 구조를 엮어가는 방법, 물감 덩어리를 쌓아 빛을 표현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의 작업 세계는 그때 던진 질문에서 출발했습니다.
Q. 빛과 공간은 작가님의 작업 안에서 어떻게 연결되나요? A. 빛이 있으려면 공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야외에서는 햇빛을 직접 바라보기도 하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많은 빛은 어떤 공간을 통과하고, 굴절되거나 걸러진 상태로 들어옵니다. 성당 안에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이 여러 색을 품는 것처럼요. 제 작품도 일반적인 평면 캔버스와는 구조가 다릅니다. 틀을 직접 만들고 캔버스 천을 앞으로 밀어 넣거나 안으로 당겨 삼각형에 가까운 공간을 만듭니다. 정면에서는 평면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관람자의 눈에 바로 드러나지 않는 깊이가 있습니다. 그 구조 안으로 빛이 들어오면 굴절과 그림자가 생기고, 보는 위치에 따라 화면이 달라집니다. 공간을 먼저 만들고 그 안에서 빛을 해석하는 것, 그것이 제 작업의 중요한 방식입니다.



Q. 회화와 조각의 경계에 있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A. 제 작품을 보고 회화 작가인지 조각가인지 묻는 분들이 많습니다. 미술관이나 기관에서 작품을 구입하면서 장르를 표기할 때도 회화인지 조각인지 고민했던 적이 있고요. 하지만 지금은 재료와 표현 방식이 매우 다양해졌기 때문에 꼭 하나의 장르로 구분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과거에는 물감으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면 회화, 흙이나 단단한 재료로 형태를 만들면 조각이라고 나누었지만 현대미술에서는 그 경계가 계속 달라지고 있습니다. 제 작업 역시 회화와 조각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기보다 두 영역을 합치고, 그 사이에서 새로운 표현을 찾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Q. 작업에서 ‘시간의 축적’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A. 오래된 물건을 바라보면 그 안에 담긴 세월의 깊이와 추억, 그 물건을 거쳐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느끼게 됩니다. 제 작업도 그런 시간을 품었으면 합니다. 틀을 만드는 일부터 캔버스 천을 당기고 바탕을 여러 번 칠하는 과정, 물감을 올리고 기다린 뒤 다시 쌓는 과정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특히 유화 물감은 한꺼번에 두껍게 올려 완성할 수 있는 재료가 아닙니다. 물감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기다리며 차곡차곡 쌓아야 합니다. 그렇게 축적된 시간 안에는 작가의 감각과 몸의 움직임, 작업을 대하는 마음까지 함께 들어갑니다. 저는 관람자가 작품을 한눈에 모두 이해하기보다 껍질을 한 겹씩 벗기듯 바라보며 그 안의 시간과 감각을 계속 발견할 수 있는 작업이 좋은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Q. 〈흔적과 부활의 유희〉는 어떻게 시작된 작업인가요? A. 젊었을 때 피카소가 사용했던 작업 도구들이 경매에서 거래되는 모습을 접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나도 언젠가 유명한 작가가 될 테니 내가 쓰던 것들을 모아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 돌아보면 어린 시절의 욕심이었지만, 그때부터 쓰고 남은 물감과 물감 튜브, 캔버스 조각, 손때 묻은 도구들을 버리지 않고 모았습니다. 이후 한 독립 큐레이터에게 대안공간 전시를 제안받았습니다. 그 공간을 작가의 실험실이라고 생각하고 새로운 오브제 작업을 해보자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파리에서부터 모아온 물건들을 다시 꺼내게 됐습니다. 이미 쓰임을 다해 버려질 수 있었던 것들을 놀이하듯 조합하고 새로운 작업으로 부활시킨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사용한 재료로 작업했지만 작품이 이어지면서 주변 작가들이 쓰던 물감과 도구도 받아 사용하게 됐습니다. 다른 작가의 손때가 묻은 물감 튜브와 도구에는 그 사람이 작업하며 보낸 시간과 감각이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재료를 사용할 때는 자연스럽게 그 작가를 떠올리게 되고, 그 사람의 감성과 흔적을 제 방식으로 다시 해석하게 됩니다. 〈흔적과 부활의 유희〉는 버려진 재료를 재활용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안에 남아 있는 시간과 기억을 새로운 작품으로 이어가는 작업입니다.

Q. 〈틈, 사이 빛〉 시리즈의 출발점은 무엇이었나요? A. 저는 작업이 멈추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윤슬을 통해 바다 위의 빛을 표현하고 나니 세상에는 이런 빛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공간에는 어떤 빛이 있고, 그것을 또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안도 다다오의 ‘빛의 교회’를 보았습니다. 벽의 틈에서 들어오는 빛이 무척 아름다웠고, 그 빛에서도 생명과 희망의 메시지를 느꼈습니다. 틈을 통과한 빛은 공간에 따라 크기와 방향이 달라지고, 때로는 색을 품기도 합니다. 저는 그 다양한 빛을 여러 색의 물감과 입체적인 구조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윤슬의 빛에서 또 다른 빛으로 나아가며 〈틈, 사이 빛〉 시리즈가 시작됐습니다.
Q. 여러 색 가운데 블루는 작가님에게 어떤 색인지 궁금합니다. A. 블루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색입니다. 파리에서 가져온 블루 피그먼트를 작업실에 두고 있다가 여러 작가와 함께한 그룹전에서 처음 본격적으로 사용했습니다. 피그먼트의 발색이 무척 강하고 선명해서 제 작품이 전시장 안에서 확연히 다른 존재감을 드러냈어요. 주변 작가들이 제 블루 작품 옆에는 자신의 작품을 걸고 싶지 않아 할 정도였습니다. 그때 이 색이 가진 힘과 가능성을 분명하게 느꼈습니다. 한국에서는 특별한 블루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제가 파리에 있을 때는 페인트 가게에서도 구할 수 있는 안료였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재료의 이름이나 희소성보다 그 재료를 어떻게 다루고, 어떤 구조와 감각 안에 담아내느냐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블루를 사용하더라도 작가가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색의 힘은 더 커질 수도 있고 약해질 수도 있습니다.



Q. 블루 외에 다른 색을 선택하는 기준도 있나요? A. 미술을 배우고 좋아하며 작업해 온 시간이 어느덧 45년이 넘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여러 색을 사용해왔지만 어떤 색에는 어떤 색을 배치해야 한다는 식의 정해진 공식은 두지 않았습니다. 작품을 만들던 순간의 감정과 제가 쌓아온 경험, 몸에 밴 감각에 따라 색을 선택합니다. 레드와 화이트, 그린을 사용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배색의 규칙을 정한 뒤 화면을 채우기보다 그때의 감각을 믿고 색을 칠하거나 물감을 올려왔습니다. 오랜 시간 작업하면서 쌓인 경험이 순간적인 선택 안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Q. 원화를 에디션으로 옮기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A. 저는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정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아트앤에디션과 에디션을 제작할 때도 원작의 이미지를 반복해 보여주는 데서 끝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종이 위에 올라간 물감 덩어리가 구조적으로 견고하게 지탱되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작품의 형태가 유지될 수 있어야 했습니다. ‘100년, 200년이 지나도 오래갈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으로 완성도를 고민했습니다. 또 하나 중요했던 것은 차별성과 고유성입니다. 에디션은 하나의 이미지를 반복해 제작하지만, 제가 만든 에디션은 각각이 다른 한 점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작가가 직접 물감을 올리기 때문에 물감의 두께와 결, 형태가 조금씩 달라집니다. 같은 시리즈 안에 있지만 각 소장자가 받아보는 작품은 저마다 다른 표정을 지닌 유일한 한 점에 가깝습니다. 하나이면서 전혀 다른 하나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Q. 관람자나 소장자가 작품에서 어떤 부분을 발견했으면 하나요? A. 제 작품은 반입체적인 구조이기 때문에 빛이 닿는 방향에 따라 그림자와 깊이가 계속 달라집니다. 아침 햇살이 창가로 들어올 때와 한낮, 조명을 켠 저녁에 바라보는 느낌이 서로 다릅니다. 정면에서 볼 때와 옆으로 움직이며 볼 때도 새로운 부분이 보이고요. 오늘 보았을 때와 내일 다시 보았을 때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변화는 화면의 구조뿐 아니라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나옵니다. 저는 기본이 되는 바탕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제소칠만 일곱 번, 여덟 번씩 반복합니다. 캔버스의 구조를 견고하게 만들고 그 위에 물감을 계속 쌓아 올립니다. 눈에 바로 보이지 않는 과정과 시간이 모여 하나의 작품이 됩니다. 관람자가 그 흔적을 껍질을 벗기듯 하나씩 발견하면서, 오늘과 내일이 다른 감각을 느꼈으면 합니다.
Q. 앞으로는 빛을 어떤 방식으로 확장해가고 싶으신지 듣고 싶습니다. A. 지금도 서로 다른 공간에서 나타나는 빛을 계속 연구하고 있습니다. 중정으로 들어오는 빛, 작은 구멍을 통해 바라보는 안쪽의 빛, 창가로 들어와 시간과 햇빛의 조도에 따라 달라지는 빛에 관심이 있습니다. 같은 빛이라도 어느 공간을 통과하고 어느 시간에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이 됩니다. 앞으로는 아침에 들어왔다가 시간에 따라 이동하고, 다음 날 다시 찾아오는 빛의 흐름을 대형 작품으로 표현해보고 싶습니다. 한순간의 빛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달라지는 빛을 화면 안에 담는 작업입니다. 윤슬에서 시작된 빛이 틈과 중정, 작은 구멍과 창가로 이어지듯 앞으로도 새로운 빛의 모습을 계속 찾아갈 생각입니다.




Q. 작가에게 ‘새로움’과 ‘전시’는 어떤 의미인가요? A. 작가는 계속 작업하고 전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시는 완성된 작품을 보여주는 자리에 그치지 않고, 작가가 가진 감정과 철학, 새로운 화두를 관람자에게 전달하는 과정입니다. 전시가 많고 적은 것보다 작업과 전시를 통해 경험을 쌓고, 그 경험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스님이 오랜 수행을 통해 부처에 가까워지듯, 작가도 작업과 전시를 거듭하며 조금씩 익어간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카뮈의 글에 등장하는 ‘반항’ 역시 단순한 부정이나 파괴가 아니라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태도로 다가옵니다. 예술가에게 필요한 반항도 그런 새로움이라고 봅니다. 작업을 멈추지 않고 계속 변화하려는 태도를 통해 자신의 예술 세계에 조금씩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바다 위에서 부서지던 윤슬은 벽의 틈으로 들어오는 빛이 되고, 다시 중정과 창가, 작은 구멍 안에서 발견되는 빛으로 이어집니다. 김세중의 회화 역시 하나의 형식에 고정되지 않습니다. 평면은 공간으로 확장되고, 버려진 재료는 새로운 생명을 얻으며, 반복해서 제작되는 에디션은 저마다 다른 한 점이 됩니다.


“남보다 표현을 잘하지 못하더라도 남과 다른 방법을 찾고 싶었다.” 김세중이 작업을 시작하며 품었던 생각은 지금도 그의 화면을 움직이는 힘입니다. 빛과 공간, 회화와 조각, 지나간 시간과 앞으로의 가능성을 잇는 일. 김세중은 그 연결 속에서 자신만의 회화를 계속 만들어갑니다.
Interview by ARTN Edi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