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노트] 김종학의 편지, 사람도 꽃이다

May 27, 2026

[전시노트] 김종학의 편지, 사람도 꽃이다

설악의 꽃은 풍경이 아니라, 한 사람이 오래 견뎌온 마음의 색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복합문화공간 설악산책에서 열리고 있는 《김종학의 편지, 사람도 꽃이다》는 ‘설악의 화가’, ‘꽃의 화가’로 불리는 김종학의 작품세계를 가장 사적인 관점에서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전시다. 새롭게 문을 연 설악산책 갤러리의 첫 전시라는 점에서도, 이 공간과 작가가 지닌 장소성은 자연스럽게 맞물린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전시의 온도다. 1층 전시 《김종학의 편지》는 화가 아버지가 자녀에게 보낸 그림편지의 형식 안에서, 거장의 이름 뒤에 놓인 한 인간으로서의 다정한 마음을 보여준다. 강렬한 색채와 생명력으로 기억되는 김종학의 회화가 이곳에서는 조금 더 사적인 언어로 다가온다. “기쁘다, 궁금하다, 축하한다” 등 꾸밈없이 써 내려간 문장들에서는 자녀들을 향한 마음이 그대로 느껴진다. 한 장의 편지 위에 수놓인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가 얼마나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이 편지들을 써 내려갔는지 느껴져 조용한 감동이 남는다.

설악산책, 김종학의 편지
Photo by ARTN Edition

이 편지들은 단순히 다정한 가족의 기록에 머물지 않는다. 그 안에는 예술가로서의 고독과 흔들림, 작업을 향한 의지, 현실에 대한 고민, 그리고 자녀를 향한 미안함과 자부심이 함께 스며 있다. 한 장의 편지는 가족에게 보내는 사적인 글이면서 동시에, 김종학이라는 한 사람의 내면을 보여주는 가장 솔직한 자화상처럼 다가온다.

설악산책, 김종학의 편지
Photo by ARTN Edition

2층 전시 《사람도 꽃이다》는 김종학이 바라본 사람의 얼굴과 존재를 꽃의 감각으로 확장한다. 그에게 꽃이 단순한 자연의 재현이 아니었듯, 사람 역시 하나의 형상이나 초상이 아니라 저마다 다른 색과 리듬을 가진 생명에 가깝다. 화면 속 인물들은 어딘가 거칠고 자유롭지만, 이상하게도 따뜻하다. 꽃을 그리듯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 안에서, 삶의 다양함과 생명력이 선명하게 피어난다.

이번 전시가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설악이라는 장소에 있다. 김종학에게 설악은 단순히 작품의 배경이 아니라, 오랜 시간 작업의 중심이자 삶의 일부였다. 설악산책의 전시 공간에서 그의 작품을 마주하는 일은 한 작가의 회화를 보는 것을 넘어, 그가 머물고 바라보고 사랑했던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처럼 느껴진다. 강한 색과 자유로운 붓질 사이로, 설악의 공기와 사람을 향한 애정이 오래 남는다.

설악산책, 김종학의 편지
Photo by ARTN Edition

전시를 보고 나오며 오래 남는 건, 머리보다는 마음에 먼저 닿는 감정이다. 좋은 그림은 멀리 있는 것을 설명하기보다, 가까운 마음을 다시 보게 만든다는 것. 꽃도 사람도, 편지도 그림도 결국은 누군가를 향해 피어나는 마음일 수 있다는 것. 설악산책에서 만나는 김종학의 세계는 그래서 화려하기보다 깊고, 강렬하기보다 오래 따뜻하다.

사랑하는 홍석아
네 생일을 축하한다.
한 송이 꽃은 씨앗으로부터 시작하여 땅속에서
어둡고 긴 시간을 보내야 비로소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난단다.

- 김종학의 편지: 화가 아버지가 자녀에게 보낸 그림편지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