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유리 너머의 시선, 최경문
Mar 2, 2026
최경문의 화면에는 늘 유리가 놓여 있다. 병과 잔, 향수병, 그리고 최근의 병뚜껑까지. 반짝이는 표면은 극사실적 묘사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지만, 그의 관심은 단순한 재현에 머물지 않는다. 유리는 세계를 바라보는 창이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는 벽이다. 투명하게 소통하는 듯 보이지만 끝내 닿을 수 없는 거리, 작가는 그 사이에서 인간과 사회를 바라본다.
Q. 미술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A. 어릴 때부터 그림을 자연스럽게 접했습니다. 세 분의 누님 가운데 큰누님이 화가셨는데, 초등학교 시절 대학생이던 누나가 작업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게 되었죠. 그림 자체도 인상적이었지만, 무엇보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무척 멋있게 느껴졌습니다. 그 장면이 오래 남아 미술부 활동을 시작했고, 중·고등학교를 거치며 자연스럽게 그림을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Q. 다양한 회화 방식 가운데 극사실주의를 선택하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A. 가장 큰 영향 역시 누님의 작업이었습니다. 당시 극사실 회화를 하셨는데, 벽돌 담과 오브제를 정밀하게 묘사한 작품이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수상하는 모습을 보며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처음 깊이 접한 회화가 극사실이었고, 그 매력에 자연스럽게 끌렸던 것 같습니다.
Q. 작업에서 ‘유리’가 중심 소재로 등장하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A. 어릴 적 집에는 어머니가 수집하신 유리병과 컵, 도자기 오브제가 진열장 가득 놓여 있었습니다. 만져보고 싶었지만 쉽게 열어볼 수 없었죠. 몰래 꺼내 빛에 비춰보거나 그 너머로 사물을 바라보던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반짝이는 표면과 매끄러운 질감, 그리고 굴절된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장면이 오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 작업을 시작하며 인간관계와 사회 속에서 느껴온 여러 장벽들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관계뿐 아니라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이념과 가치의 차이처럼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경계들입니다. 완전히 차단되지는 않지만 쉽게 닿을 수 없는 상태. 그 감각이 유리와 닮아 있다고 느꼈습니다. 소통은 가능하지만 합쳐지지 않는 거리, 그것이 제가 유리를 선택하게 된 이유입니다.
Q. 향수병, 꽃, 인물, 그리고 최근의 병뚜껑까지 다양한 소재가 등장합니다. 각각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나요. A. 기본은 언제나 유리입니다. 유리는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자 벽이라는 전제 안에서 작동합니다. 유리 너머에 놓이는 대상은 그 생각을 더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소재를 찾는 과정에서 선택됩니다. 병뚜껑의 경우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했습니다. 재수 시절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병뚜껑이 따지는 순간 반짝이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는데, 가장 위에 있던 존재가 한순간 아래로 추락하는 장면이 당시 제 모습과 겹쳐 보였습니다. 또 한편으로 병뚜껑은 세계 각지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디자인을 지니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문화와 가치처럼 보이지만 모두 동일한 존재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인간 사회를 상징하는 소재라고 느꼈습니다.
Q. 향수병 위로 물감이 흘러내리는 작업도 인상적입니다. A. 향수병 역시 유리를 기반으로 합니다. 다만 이 작업에서는 시각적 왜곡이 아니라 후각적 왜곡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인간에게는 본래의 향이 있지만 향수를 통해 다른 이미지로 자신을 꾸미기도 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흘러내리는 물감은 그 욕망의 형태를 표현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욕망의 종류가 다양하듯 색 역시 다양하기 때문에, 물감이 분출되고 흐르는 장면을 통해 욕망과 왜곡의 관계를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Q. 이전 작업에서 등장했던 물방울은 어떤 의미였나요. A. 정물화는 기본적으로 정지된 상태를 다룹니다. 그 안에 시간의 흐름을 넣고 싶었습니다. 물방울은 증발하거나 흘러내리는 속성을 지니기 때문에 순간을 붙잡아 두는 장치로 선택했습니다. 현재를 붙들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과도 닮아 있다고 느꼈습니다. 다만 물방울은 반드시 필요한 요소는 아닙니다. 작업의 감정이나 화면의 필요에 따라 등장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Q. 유리병이나 오브제를 선택하는 기준이 있다면요. A. 내용적인 의미도 중요하지만 결국 회화는 시각예술이기 때문에 조형적 완성도가 필요합니다. 구도와 화면의 균형을 먼저 떠올리고, 그에 맞는 유리를 찾습니다. 주로 남대문 유리 상가를 자주 찾습니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표면의 무늬와 굴절 방식, 소재와의 조합을 생각합니다. 어떤 유리가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낼지 상상하며 선택하는 과정 자체가 작업의 일부입니다.
Q. 앞으로의 작업 방향에 대해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A. 초기에는 왜곡이 없는 유리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작업을 했다면, 이후에는 왜곡된 유리를 통해 변형된 세계를 보여주는 단계로 이어졌습니다. 앞으로는 그 장벽 자체가 사라지는 장면을 그리고 싶습니다. 유리에 균열이 가거나 깨지는 이미지를 통해 단절이 해소되고 소통이 가능해지는 상태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불평등과 이분화된 세계를 넘어 조금 더 희망적인 방향을 상상해 보고 있습니다.
Q. 스스로를 ‘예술 노동자’라고 표현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A. 노동에는 귀천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택배 노동자나 거리 청소 노동자, 의료인, 요리사, 그리고 화가 모두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으로서 각자의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림을 그린다는 이유로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 역시 그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고, 노동의 가치를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예술 노동자라고 부릅니다.
Q. 관람객이 작품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길 바라시나요. A. 작가는 작품과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관람객에게 특정한 해석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시각예술이기 때문에 먼저 즐거움을 느끼셨으면 합니다. 취향은 각자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이미지 자체에서 감각적인 즐거움을 먼저 발견하고, 그 이후 관심이 생긴다면 더 깊이 들여다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Interview by ARTN Edi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