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이큐와 관계항 앞에서
Feb 23, 2026
“버리고 비우면 보다 큰 무한이 열린다.”
호암미술관 옛돌정원에 놓인 거대한 스테인리스 링은 조각이라기보다 하나의 장면처럼 보인다. 전시된 돌은 다듬어지지 않은 채 놓여 있고, 금속은 빛을 반사하며 주변 풍경을 끌어들인다. 사실, 이 작품에서 중심은 재료가 아니다. 돌과 스테인리스 사이의 거리, 그 사이를 흐르는 공기, 그리고 그 장면 앞에 서 있는 관람자의 위치가 함께 작품을 구성한다. 이처럼 이우환 작가의 관계항은 형태가 아니라 관계를 보여주는 구조이다.
1960년대 말 일본에서 등장한 ‘모노하’는 사물을 거의 가공하지 않은 채 배치하며 조각의 개념을 흔들었다. 돌은 상징이 아니라 돌 그 자체이고, 철은 무엇을 재현하는 재료가 아닌 하나의 존재일 뿐인데, 작가는 바로 이 운동의 이론적 중심에 서 있었다. 그는 사물을 완성하는 대신 사물이 서로를 드러내는 조건을 설정했다. 관계항은 바로 그 사유의 연장선에 있다. 작가는 무엇을 만들었는가보다, 어디에 두었는가에 더 무게를 둔다.
사이를 보는 시선큐레이터의 시선으로 관계항을 마주할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재료의 대비보다 배치의 긴장이다. 돌은 무겁고 거칠며 시간을 품고 있고, 철은 차갑고 매끈하며 현재의 빛을 즉각 반사한다. 그러나 이 대비는 대립으로 닫히는 것은 아니다. 두 사물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자리를 남겨둔 채 공존한다. 작품의 의미는 내부에 있지 않고 그 사이, 즉 관계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관계항은 닫힌 조형이 아니라 열린 상태로 작동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점 작업도 같은 구조를 가진다. 화면 위의 점은 또렷한 동그라미가 아니다. 붓을 누르고 밀면서 물감이 점점 옅어지고 사라진다. 한 점 안에는 시작과 소멸이 함께 들어 있다. 중요한 것은 점의 형태가 아니라 붓이 멈춘 자리이다. 더 밀 수 있었지만 멈춘 그 지점에서 여백이 생기고, 그 여백이 결국 화면을 숨 쉬게 한다. 그림은 점과 점 사이, 점과 빈 공간 사이에서 완성된다.
공간과 화면에서 울리는 같은 질문 관계항이 돌과 철 사이의 거리를 드러낸다면, 점 작업은 물감과 여백 사이의 거리를 드러낸다. 하나는 공간에서 벌어지고, 다른 하나는 평면에서 벌어지지만 둘 다 같은 질문을 던진다. 존재는 어디에서 성립하는가. 이우환 작가의 작업은 사물 그 자체를 강조하기보다, 사물과 사물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관계를 드러낸다.
관계항 앞에 서 있으면 작품을 해석하기보다 잠시 멈추게 된다. 작품은 하나의 고정된 의미로 수렴되지 않는다. 그래서 관계항은 긴장 속에 있으면서도 닫히지 않는다. 서로 다른 것들이 서로를 지우지 않고, 그대로 존재하는 상태. 그 열린 구조가 이우환 작업의 중심에 있다.
모노하에서 시작된 ‘만들지 않는 방식’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덜어내고, 남겨두고, 배치하는 방식. 그 결과로 남는 것은 형태가 아니라 관계다. 돌과 철 사이의 거리, 사물과 공간 사이의 숨, 그리고 그 장면 앞에 선 우리의 위치까지 포함하는 관계. 세계는 사물의 집합이 아니라 관계의 장인지도 모른다.
글 이혜민 큐레이터18년간 미술관과 전시 현장에서 활동해 왔다. 한국일보 문화사업단, 일민미술관, 서울경제 백상미술정책연구소를 거치며 작품 앞의 순간을 기록했다.
- Info
- 이우환 상설 프로젝트 <실렌티움(묵시암)>
- 호암미술관
- 관람요금: 25,000원 (전시+희원+실렌티움+옛돌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