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평론] 김시현의 보자기, 오래될수록 오래 새로운
Jan 20, 2026
정신의 현현인 예술에서 ‘전통’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는가의 문제는 작가 개인에게 궁극적으로는 작가의 이념적 좌표를 결정하는 배경이며 화두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전통은 시간의 연속성의 개념이 아니라 개인에게 바람직하다고 실감되는 선대의 창작의 주제와 방법”이라고 한 엘리엇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시간의 연속성과 계속성은 우리가 흔히 전통에 대하여 고정관념으로 인식하던 불변의 개념인데 엘리엇은 이를 해체하고 혁명에 가까운 새로운 전통의 뼈대를 세웠다. 혁명은 언제나 기존과의 불화에서 싹트는 ‘불순’과 ‘참신’의 팽팽한 역사적 대회전을 통해 그 실체를 드러낸다. 엘리엇의 전통론은 이러한 신구의 도전과 응전으로 수립된 신생 ‘전통 제국론’이다. ‘답습’은 나태와 피동의 서식지로 시간의 연속성에 기생하는 일개 숙주임을 엘리엇은 명징하고 섬세한 이성으로 간파하여 규정했던 것이다. 답습은 그냥 답습일 뿐 능동적이며 창조적인 감각을 원천 봉쇄하는 기계적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 개인에게 바람직하다고 실감되는 선대의 창작의 주제와 방법은 결국 작가가 과거와의 치열한 탐색과 대화를 통해 찾아낸 ‘수고’의 산물인 것이다.
우선 전통의 제일 조건은 통시적으로 오래된 것일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닌다. 그러나 오래된 것이라고 모두 전통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데 전통의 가변성이 존재한다. 넓은 의미에서 전통의 범주에 산개(散開)해 존재했던 일종의 유사적 전통을 현대적 의미로 소환하는 일은 그 자체로는 특별한 역사성을 갖지 못한다. 소환하여 부여한 의미가 후대의 ‘승인’이 될 때 전통은 새롭게 갱신이 되기 때문인데 소환 자체만으로는 이러한 승인을 담보하기 어려운 탓이다. 과거의 어떤 것이 현재의 필요성에 의해 의미 있게 작용하고 ‘운동성’을 가질 때 비로소 과거의 어떤 것이 전통의 외피를 입게 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과거의 어떤 것은 단지 전통의 잠재적 가능성에 지나지 않으며 승인이 미루어진 지체된 전통의 아류다. 이 과정에서 현재성의 부단한 모색과 치열한 예술적 열정 그리고 이것들과의 끊임없는 긴장 관계를 통해 형성된 ‘경계’가 새로 도래한 어떤 힘의 진원지가 되는데 김시현의 보자기는 이러한 전통에 대한 사투의 흔적의 결과물로 탄생한 새로운 차원의 오브제(objet)다. 본격적인 유화 작업 전에 그가 특별히 수행하는 작업 과정이 그렇고, 끊임없이 변주하며 보자기가 전하는 현대적 메시지가 대표적으로 또한 그렇다.
그의 그림 작업은 대상을 객관적 거리에서 스케치해 들어가는 낭만적 포즈와는 결을 달리한다. 유화 작업 전에 그릴 소재를 재현하기 위해 발품을 팔고 분주한 손길이 가는 지난한 제작 과정이 선행되기 때문이다. 일부러 초대하여 환대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한 올 한 올, 한 땀 한 땀 기워 나간 공력을 쏟는 장인의 시간과 일찍 조우(遭遇)하게 되는 셈이다. 이 과정은 보통의 그림 작업보다 여러 번 손길이 더 가는 ‘진자리’인데 일종의 ‘직조(織造)’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전통적 소재에서 보이는 특유의 단순함이 자칫 답습의 유혹으로 번질 가능성도 상존하지만 김시현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 오히려 ‘파격’에 가까운 변화를 주도한다. 김시현의 보자기가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개방적이면서도 모종의 ‘비의(秘義)’를 간직한 신비스러운 이유다.
김시현의 보자기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자기가 아니라 궁중이나 사대부의 집에서 쓰던 화려한 보자기가 주를 이룬다. 게다가 소위 극사실주의에서 한 발 더 나가 김시현 다운 새로운 보자기를 창조하는데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보자기에 싸여 있는 물건이 주는 이의 정성과 사랑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화려함만을 생각한다면 보자기의 ‘매듭’도 화려함에 값하는 치장 중심의 매듭일 텐데 김시현의 매듭은 질끈 동여매 실용성을 살리며 자연스러움을 추구한다. ‘질끈’이란 단어처럼 서민의 생활어와 밀착된 말도 흔치 않다. 그가 서민들이 주로 애용했던 소박한 보자기를 그렸다고 해도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을 것’이라 단언하는 이유다.
보자기 자체는 정물의 대상이긴 하지만 그 독특한 전래적 실용성으로 인해 여러 형태로 변주가 가능한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와 같다. 한 인간의 전체를 규정하는 성질이 ‘표(表)’라기보다 ‘리(裏)’의 섬세한 정서와 감정이 좌우하듯 김시현의 보자기도 싸고 담고 두르는 모양으로 고정된 보자기 자체의 표(表)의 이미지를 뛰어넘어 새로운 메시지를 창조한다는 것에 있다. 기존 보자기에 투영된 ‘아포리즘’ 즉 실용성이 주는 메시지를 기본으로 또 다른 메시지를 창출하는 힘이 김시현 보자기의 핵심이다. 그가 지금까지 탐색해온 ‘The Precious Message’가 이러한 흐름을 반영한다.
이는 역사적 감각에 대한 탁월한 ‘해석’과 ‘직관’의 소산이다. 역사적 감각은 과거의 과거스러움 뿐 아니라 과거의 ‘현재스러움’을 자각하는 것이며 단지 자기뿐만 아니라 인류문화 전체를 포괄하는 동시적 질서에 대한 통합적 인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회의 주제와 직결되는 인식이기도 하다. ‘오래된 것이 새롭다’는 인식은 과거의 현재스러움을 발견했을 때 느끼게 되는 감각인데 이는 과거의 과거스러움에 대한 진지한 통찰이 전제될 때 지향성을 갖는 안목이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의미가 새로움(新)에 방점이 있다고 하지만 그 새로움은 반드시 옛것(古)에 대한 성찰과 탐구가 전제되어야 하는 이치와 같다.
오래된 것은 새롭다. 그러나 김시현의 그림, 혹은 김시현의 예술이 가진 힘은 그냥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오래 새롭다’는 것이다. 오래 새롭기 위해서는 쉽게 노출되거나 포획되지 않는 전략적 모호성이 필수적인데 이는 단점이 아니라 큰 장점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 해석의 여지가 풍부하며 다양하기 때문이다. 어느 것 하나로 규정되는 순간 관람자(대중)의 호기심과 그림을 향한 매력은 현저히 감소할 수밖에 없다. 이미 정의된 그림에 관람자가 충격할 향수와 여백은 없다. 앞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다채로운 관점은 어쩌면 이미 보자기의 태생적인 실용성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김시현의 정평이 난 ‘지구력’은 이 같은 모호성을 일관되게 심화시키는 최신의 ‘빌드 업(build-up)’이다. 성현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알거나 좋아하는 것보다 더 상위는 ‘즐기는 것’인데 즐기는 것이야말로 김시현 지구력의 마르지 않는 ‘샘물’이다. 보자기는 그런 오래된 샘물을 ‘젖줄’로 하는 까닭에 새롭게 또 새롭게 거듭나며 호흡이 긴 생명력을 갖는다.
강찬모 문학평론가 . 시인 시집 『사크레쾨르 대성당의 나비』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