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기록] 그리는 것이 아니라 쓰는 그림, 허달재
Jan 14, 2026
허달재의 그림 앞에 서면 색보다 먼저 시간의 밀도와 축적된 맥의 무게가 전해진다. 화려함보다는 오래 축적된 손의 감각이, 즉각적인 인상보다는 반복된 시선이 화면 안에 고요히 쌓여 있다. 그의 그림은 한 번에 다가오기보다, 천천히 바라보는 시간을 요구한다.
이번 대화에는 작가 허달재와 함께 에디션과 컬렉팅의 현장에서 한국 미술의 흐름을 지켜봐 온 아트앤에디션 박소연 대표가 동석했다. 작가의 언어와 시장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교차하며, 한국화가 지나온 자리와 지금의 의미를 차분히 짚어보는 시간이 이어졌다.
“남종화는 바르는 그림이 아니라, 쓰는 그림이에요” 허달재는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며 북종화와 남종화의 차이부터 꺼낸다. 북종화가 본을 바탕으로 색을 채워가는 그림이라면, 남종화는 대상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그 대상이 남긴 느낌과 기운을 써 내려가는 그림이다. 그에게 그림은 묘사라기보다 기록에 가깝다. 눈앞의 풍경을 옮기기보다, 그 풍경이 남긴 잔상과 감각을 화면에 남긴다. 붓은 형태를 만드는 도구라기보다 추사 김정희로부터 이어진 남종화의 사의(寫意)를 현재의 언어로 적어 내려가는 필기구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박소연 대표는 요즘 한국화의 현실을 덧붙인다. “지금 한국화 작가들 가운데 전통을 지키면서도 이렇게 현재의 감각을 유지하는 경우는 많지 않아요. 그래서 선생님 작업이 더 또렷하게 보이는 것 같아요.”
시간이 만든 시그니처, 산수화에서 매화로 허달재는 처음부터 매화만을 그린 작가는 아니다. 한때는 산수화를 중심으로 작업을 이어왔다. “예전에는 산수화를 그려야 작가 대접을 받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가격도 산수화가 더 높았고요.” 그러나 시대와 감상의 방식이 변하면서, 작가 역시 남종화의 전통을 유지한 채 대상의 형식과 밀도를 스스로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산수화는 점점 시장에서 멀어졌고, 매화는 오히려 사람들의 일상에 먼저 닿기 시작했다.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매화는 그의 작업을 설명하는 얼굴이 되었고, 그렇게 이어진 시간이 어느덧 20년을 넘겼다. 박소연 대표는 이 변화를 컬렉터의 감각 변화로 읽는다. “요즘 컬렉터들은 직관적인 이미지를 원하지만, 가볍기를 바라지는 않아요. 허달재 선생님의 매화는 익숙하지만 오래 보고 싶고, 담백한데 힘이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뉴욕과 파리 등 해외 전시를 통해 먼저 주목받았고, 이후 매화 연작으로 이어지며 그의 작업 세계를 더욱 또렷하게 만들었다.
남도 그리고 서해의 감각, 환경이 만든 화면 허달재의 작업에는 그가 살아온 장소의 감각이 깊게 스며 있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어요. 바닷가에 살면 바다가 나오고, 농촌에 살면 그 풍경이 그림에 들어오죠.” 나고 자란 광주, 무등산과 그 기슭의 의재미술관이 그렇다. 특히 그는 서해의 풍경을 중요하게 이야기한다. 동해의 강한 에너지보다, 잔잔하고 여백이 많은 서해의 분위기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 편안하게 다가온다. 이러한 감각은 그의 화면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색은 분명하지만 요란하지 않고, 차분하지만 단단하다.
작가와 컬렉터의 사이에서, 그림을 ‘사는 문화’에 대하여 대화는 자연스럽게 한국의 미술 소비 문화로 이어졌다. 박소연 대표는 남도 지역에서 경험한 한 장면을 떠올린다. “오래된 식당이나 여관에 가면 액자가 삐뚤게 걸린 그림들이 있어요. 관리가 잘된 건 아니지만, 그 공간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게 존재하죠.” 허달재 역시 그 시절을 이렇게 기억한다. “예전에는 그림을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친구들끼리 모여 그림을 걸어두고, 뽑기로 한 점씩 나눠 갖기도 했죠. 밥 먹고 이야기하고, 그림은 그 사이에 있었어요.” 박소연 대표는 이런 태도가 지금 더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림을 소유나 투자로만 바라보면 결국 일상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어요. 아트앤에디션이 에디션 작업을 하는 이유도, 그림을 다시 생활 안으로 들이기 위해서예요.”
원화의 감각을 일상으로 옮기는 일, 에디션 판화에 대하여 허달재의 작업은 한 점의 원화로 완결되지만, 그 세계를 더 많은 공간과 연결하는 방식으로 에디션 판화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그는 에디션 작업에서 색의 깊이와 종이의 질감을 가장 중요하게 본다.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는 매화의 색조일수록, 미세한 차이가 화면 전체의 인상을 크게 바꾸기 때문이다. 박소연 대표는 에디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에디션은 단순한 복제본이 아니에요. 원화의 분위기와 밀도를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게 하는 또 하나의 작품이죠.” 이번에 새롭게 작업하는 허달재 에디션 판화는 원화의 화면 비율과 붓의 흐름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사이즈 조정부터 인쇄 방식, 색감 테스트까지 여러 차례의 과정을 거쳤다. 특히 매화의 붉은색과 분홍색 계열은 일상 공간에서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도록 세심하게 조율됐다. “에디션을 통해 처음 제 그림을 만나는 분들도 많아요. 집 안 한쪽에 걸어두고, 오래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박소연 대표는 에디션이 새로운 컬렉터로 이어지는 가장 현실적인 출발점이라고 덧붙인다. “큰 결심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그림 한 점이 공간을 바꾸고, 그 경험이 다시 다음 그림으로 이어지거든요.”
지금, 그리고 앞으로 허달재는 한국화의 현실을 낙관적으로만 바라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태도는 분명하다. “전통을 버리자는 게 아니에요. 그 안에서 지금의 언어를 찾는 거죠.” 박소연 대표는 그의 작업을 이렇게 정리한다. “유행을 따르지 않는 그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단단해집니다.” 허달재의 매화는 그렇게 오늘도 조용히 피어 있다. 빠르게 소비되지 않고, 곁에 두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깊어지는 그림으로.
글 서지아 아트 디렉터25년간 매거진 에디터 및 편집장으로 활동하며 라이프스타일과 예술 콘텐츠를 기획해왔다. 전시와 작가, 작품을 컬렉터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소장의 감각과 작품의 맥락을 함께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