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기록] 김종학의 시간을 읽다
Dec 30, 2025
현대화랑 프라이빗 렉처에서 만난 아카이브
전시가 열린 현대화랑에 들어서자, 익숙하다고 여겨왔던 김종학의 세계가 다른 밀도로 펼쳐진다. ‘설악의 화가’라는 이름으로 기억돼 온 그의 작업은 이 공간에서 풍경을 넘어, 한 사람의 삶과 태도, 그리고 사유의 궤적으로 다시 읽힌다. 화면을 채우는 색과 붓질은 여전히 힘이 있지만, 그 안에 쌓인 시간의 결은 이전보다 또렷하게 다가온다.
이번 프로그램은 도서 <화가 김종학> 출간과 연계해 진행된 프라이빗 전시 렉처로, 작가의 장녀이자 일치재단 이사장인 김현주가 직접 공간을 안내하며 작품과 아카이브를 소개했다. 전시는 단순한 회고에 머물지 않는다. 김종학이라는 이름 아래 축적된 작업의 흐름과 삶의 국면이 차분히 이어지며, 작가의 시간을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작가의 언어가 형성되던 초기의 시간전시의 초입에서 마주한 것은 비교적 소형의 드로잉과 초기 작업들이다. 거칠면서도 단정한 선, 여백을 가로지르는 붓의 움직임, 문자와 이미지가 교차하는 화면은 이후 회화로 확장될 세계의 출발점을 보여준다. 화면은 작지만, 작가가 무엇을 보고 어떻게 그리기 시작했는지가 분명하게 담겨 있다. 촛불과 인물, 사물 같은 소재들은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화면 안에서 긴장과 균형을 이룬다. 이 시기의 작업들은 이후 김종학 회화 전반을 관통하는 감각, 다름 아닌 선의 리듬과 화면의 밀도, 여백을 다루는 방식이 이미 자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풍경을 넘어선 자연 인식의 변화김종학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꽃과 숲, 산과 바다의 장면들은 이 자리에서 다시 보게 된다. 화려한 색채 너머에는 오랜 관찰과 사유가 축적돼 있고, 반복되는 자연의 형상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 하나의 언어처럼 작동한다. 자연은 그에게 배경이 아니라,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응시해야 할 대상이었다. 특히 설악산 시기의 작업들은 자연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꽃과 덤불, 폭포와 계절의 변화는 감상적인 풍경이 아니라, 생명의 기운과 시간의 흐름을 담아내는 화면으로 이어진다. 작가 자신이 자연을 통해 삶을 다시 바라보고, 다시 살아가려는 의지가 회화 전반에 스며 있다.
기록과 아카이브로 만나는 김종학의 내면렉처에서는 작품과 함께 어린 시절의 사진, 노트, 메모 등 작가의 개인적 기록도 공개됐다. 작품만으로는 알 수 없던 성정과 일상의 태도, 그리고 치열했던 내면의 시간이 조용히 드러난다. 강렬한 색과 화면 뒤편에 놓인 기록들은, 김종학의 회화를 한 사람의 삶과 분리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 아카이브들은 작가를 신화화하기보다, 한 인간으로서의 김종학을 더 가까이 느끼게 한다. 작품을 ‘보는’ 경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작가의 삶을 이해하는 시간에 가깝다.
책을 읽고 전시를 보는 일은 익숙하다. 그러나 작가의 가족이자 기획자의 목소리로 그의 세계를 따라가는 경험은 흔치 않다. 이번 현대화랑 프라이빗 렉처 프로그램은 김종학이라는 이름에 덧붙여진 수식어를 잠시 내려놓고, 한 화가가 평생 쌓아 올린 시간의 결을 차분히 따라가게 한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김종학은, 어쩌면 아직 다 보지 못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도서 〈화가 김종학〉은 작품을 넘어 한 화가의 삶과 태도를 천천히 들여다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될 터.
글 서지아 아트 디렉터25년간 매거진 에디터 및 편집장으로 활동하며 라이프스타일과 예술 콘텐츠를 기획해왔다. 전시와 작가, 작품을 컬렉터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소장의 감각과 작품의 맥락을 함께 전한다.